[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중국지식인에게 있어 중국의 옛 전통과 오늘날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의 지배를 모두 거부하 수 있는 길이었다. 중국이 처음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 것은 볼셰비키 혁명이 선도하는 것으로 생각한 국제혁명의 비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새로운 사회주의적 비전에 도달하기까지는 깊은 내셔널리즘의 길을 지나야 했다.
중국 공산당이 성립된 1921년부터 장제스가 피로 얼룩진 반혁명을 일으켜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거의 전멸시키는 1927년에 이르는 기간은 실패한 두 번의 혁명을 그 특징으로 한다. 1927년 이후에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다 정치의 장에서 사라지고 혁명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미오주의가 자라났고 1949년 혁명의 승리를 위한 담금질이 시작되었다.
1920년대 중반 중국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1917년 러시아의 경우와 비교하여 그다지 작지 않았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결코 덜 전투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20세기 어떤 지역의 노동계급운동도 혁명적 에너지, 조직적 창의성, 비범한 영웅주의, 자기 희생정신과 혁명사업에 대한 헌신이라는 면에서 중국 프롤레타리아트가 보여준 것에 미치지 못했다. 전투적인 프롤레타이라 운동은 강력한 토지 혁명과 함께했기 때문에 노농동맹에 기초한 혁명은 충분히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다. 부족한 것은 혁명을 위한 객관적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주관적인 조건이었다. 정치적으로 미성숙했던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정책에 제 발목이 묶이는 사태를 초래했고, 결국 국민당의 활동에 의존하게 되었다. 1927년 노동운동과 중국공산당에 불어 닥친 재난은 결코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사건이 아니었다.
1934년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은 국민당 군대의 맹공격 아래 붕괴되기 시작했고 그해 가을 공산주의자들은 장시의 근거지를 버리고 북쪽으로 1년에 걸친 긴 여행을 시작해야 했다. 이것이 훗날 대장정으로 알려져 찬미받게 되는 사건이다. 대장정은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을 버리고 자신들을 지지했던 농민들이 국민당 군대로부터 끔직한 보복을 당하도록 내버려둔 엄청난 정치적 패배였다. 그럼에도 대장정은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를 여는 전주곡이었으며 정치적으로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에서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는 시기였다. 대장정의 고난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그 경험은 쓰라린 것이었을지라도 새로운 희망과 강한 사명감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행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희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희망에 따라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그런 희망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이라 여겨지는 가치들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대장정 기간에 생존자보다 사망자가 훨씬 많았다는 사실은 옌안정신에 독특한 공헌을 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자기가 살아남았다는 의식은 생존자의 혁명적 사명감에 신성함을 부여했으며 거의 종교에 가까운 헌신을 낳았다. 훗날 마오는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기이하게 생각하며 죽음이 단지 나를 원치 않았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대장정은 실제적으로 혹은 훗날 상징적으로 죽음 속에서 생존하는 최고의 극단적인 시험이었다.
옌안 시기에 공산당 통치하에 있던 지역들에서 2천년간 중국사회의 지배엘리트였던 신사 지주층이 쇠락하고 붕괴되기조차 했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사회혁명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본 침략군은 본의아니게 혁명에 공헌했다. 일본이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 국민당 군대와 관료들을 제거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은 사회혁명과 내셔널리즘의 목적을 위해 농민을 조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혁명적 상황이 아무리 무르익었다 하더라도 혁명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직 혁명가만이 혁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의 관계여야 한다. 모든 돌변과 비약은 투쟁을 통과해야만 하는 일종의 혁명이다. 동시에 마오는 반스탈린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른바 사회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모순은 점진적인 진화과정을 거쳐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정통 스탈린주의의 주요 내용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질적인 비약, 과거와의 근본적인 단절, 계속되는 일련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마오의 주장은 스탈린주의 이론을 전면 거부하는 것이었다. 모리스 마이스너]
첫 번째 문제는 중국의 사회주의 역사적 경험 속에 강하게 깔려있던 민족주의라는 쟁점이다. 이는 1919년 5.4운동 이래 외세로부터 독립하고 분열을 극복한 통일된 그리고 부강한 중국의 건설이라는 열망으로 나타나, 사회주의적 경향과 병행하면서도 그것을 왜곡시켜 왔다. 그것은 농촌중심의 혁명전략이 결국은 도시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농촌에 대한 착취를 가속화하는 모델로 나아가게 만들었고, 끊임없이 ‘질서'의 이름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고, 문화혁명 종료 후 일종의 '조국방어'라는 명목 하에 미국과의 관계개선으로, 나아가 개혁개방의 새로운 산업화의 길로 나아가게 만든 요인이었다. 그 판본이 소련을 더욱 모방한 중앙집중적 형태이든, 아니며 마오식으로 다소 탈집중적인 형태이든 간에 은폐된 민족주의는 넘어서지 못했던 한계점으로 작동해 왔다.
둘째로 중국의 사회주의 경험과 노동계급 사이의 모호한 관계라는 쟁점이 등장한다. 1930년대 중국사회 성격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은 1930년대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노동계급을 형성하였다. 그 상대적 규모가 아니라 절대적 수만 놓고 보면 1940년대 말 중국 노동계급의 규모는 1917년 혁명 당시 러시아 노동계급에 비해 뒤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1920년대 여러 차례의 도시혁명의 패배이후 중국혁명은 농촌으로 철수했고, 잘 알려져 있듯이 근거지와 홍군을 통해 ‘농촌이 도시를 포위'함으로써 중국혁명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시기에도 마오의 초점은 도시는 아니었다. 인민공사로 대표되는 대약진기의 새로운 모델의 출발점도 농촌이었고, 농촌이 도시를 포위해가는 전략이 중요했다. 이는 양면적인 함의를 지닌다. 한편에서, 대중운동으로서 사회주의는 반드시 도시노동자들만의 운동은 아니며, 그 '대중'형성적 측면을 포괄하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며, 그런 점에서 '사회혁명'임을 강조해 보여준다. 다른 한편 중국사회주의에서 노동계급이 운동의 주체로서 등장한 것은 상당히 뒤늦은 일이었고, 그것은 문화대혁명시기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갖추려 하였다. 그러나 문화혁명시기 도시노동자의 대중적 열기는 달아오르는 동시에 억제되었고, 안정된 생산의 지속을 위해 다시 봉쇄되었다. 더더구나, 농촌과 도시의 높은 장벽을 통해 상대적으로 보호된 도시의 안정적 노동자층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특권세력화하였고, 이 때문에 문화대혁명기 노동자 '조반' 세력은 농촌과 도시의 경계에 서있던 '임시노동자'들이었다. 사회주의 하에서 중국노동자들은 '코포라티즘'적으로 통제되고 보호받던 세력이었으며, 이들이 오히려 사회적 동요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1990년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본격화하게 되는 가운데에서였다. 중국혁명은 노동계급의 자기전화 없이 사회주의적 전화의 길을 겪었다는 역설로 드러난다.
셋째, 문화대혁명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뜨거운 쟁점이 된 것은 사회주의 하에서의 계급의 존재였다.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주자파)으로 지칭된 세력을 색출하는 작업으로 나타난 이 쟁점은, 소유제의 사회주의적 개조의 완료에도 불구하고 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 복귀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난제를 제기하였다. 그에 대한 대답은 때로는 주의주의적인 사상문제로 나타나거나, 때로는 과거의 계급성분의 유제로 나타나면서 편향을 극단화하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그와 연관하여, 이런 경향을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라는 쟁점을 제기하는 것이었는데, 이 또한 주자파를 정치적으로 색출하고 억압하는 것으로 답이 아닌 답을 제시하였을 뿐이다. 마오는 분명 '이데올로기 혁명'의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그것은 때로 사상개조로, 때로 정치적 억압으로, 때로는 대중의 주도성으로 일관되지 않은 시도들로서 문제를 제기하였을 뿐이다.
넷째, 그러나 가장 큰 문제의 핵심은 대중운동과 당 사이의 관계였다. 마오의 가장 큰 이율배반을 보여준 사례는 마오가 문화혁명의 마오주의적 좌파들을 제거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을 종결시켰다는 점이었다. 그 좌파들은 처음에는 ‘극좌'에서 다시 '극우'로, '트로츠키주의자'로, 제국주의의 '첩자'로 다양한 죄명을 받고 사라져갔다. 1950년대 후반 반우파투쟁시기에 이미 등장한 이런 이율배반은 문화혁명기에 극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억제를 벗어나 폭발한 대중운동은 사회주의 하에서의 억압의 핵심적 적대세력으로 당관료를 지목하였고, 올바른 당과 잘못된 당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화한 당기구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갔다.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당이 아니라 당을 전복하는 대중운동이라는 역설에 직면한 마오는 결국 당의 편에 섰고, 인민해방군이라는 억압장치가 대중운동을 억누르게 되었으며, 당이 두 가지 노선에 의해 균열되어 있다는 입장을 버리고 당을 숙정함으로써 당의 무오류성을 회복하는 입장으로 전환하게 된다. 마이스너가 문화대혁명을 1966년-69년의 짧은 3년으로 보는 것도 이처럼 대중운동의 주도성이 사라지면서 무오류성의 신화를 자기강화하는 당이 복원된 시점을 중국사회주의의 실험의 종료점이라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그저 '이후'였을 뿐이다.
그 이후 1970년대에 도시노동자에 대한 소비주의적 포섭의 단초가 열리고, 대미선망적 민족주의라 할 수 있는 것이 개시된 것을 고려하면 1980년대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이미 문화혁명의 종료로부터 열려있던 것이기도 했다.
마이스너는 마오주의의 신화를 글자그대로 믿는 마오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오시기의 시도들을 ‘봉건적 잔재'나 '낙후된 농촌주의'의 잔재로 평가하는 근대화론자도 아니다. 마이스너가 강조하는 것은 마오와 마오시기가 직면한 역설들이다. 사회주의를 지향한 중국이 왜 사회주의가 될 수 없었는가를 되짚어보려는 시도로서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는 앞으로도 중요한 문제제기로 남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성립된 1921년부터 장제스가 피로 얼룩진 반혁명을 일으켜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거의 전멸시키는 1927년에 이르는 기간은 실패한 두 번의 혁명을 그 특징으로 한다. 1927년 이후에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다 정치의 장에서 사라지고 혁명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미오주의가 자라났고 1949년 혁명의 승리를 위한 담금질이 시작되었다.
1920년대 중반 중국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1917년 러시아의 경우와 비교하여 그다지 작지 않았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결코 덜 전투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20세기 어떤 지역의 노동계급운동도 혁명적 에너지, 조직적 창의성, 비범한 영웅주의, 자기 희생정신과 혁명사업에 대한 헌신이라는 면에서 중국 프롤레타리아트가 보여준 것에 미치지 못했다. 전투적인 프롤레타이라 운동은 강력한 토지 혁명과 함께했기 때문에 노농동맹에 기초한 혁명은 충분히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다. 부족한 것은 혁명을 위한 객관적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주관적인 조건이었다. 정치적으로 미성숙했던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정책에 제 발목이 묶이는 사태를 초래했고, 결국 국민당의 활동에 의존하게 되었다. 1927년 노동운동과 중국공산당에 불어 닥친 재난은 결코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사건이 아니었다.
1934년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은 국민당 군대의 맹공격 아래 붕괴되기 시작했고 그해 가을 공산주의자들은 장시의 근거지를 버리고 북쪽으로 1년에 걸친 긴 여행을 시작해야 했다. 이것이 훗날 대장정으로 알려져 찬미받게 되는 사건이다. 대장정은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을 버리고 자신들을 지지했던 농민들이 국민당 군대로부터 끔직한 보복을 당하도록 내버려둔 엄청난 정치적 패배였다. 그럼에도 대장정은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를 여는 전주곡이었으며 정치적으로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에서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는 시기였다. 대장정의 고난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그 경험은 쓰라린 것이었을지라도 새로운 희망과 강한 사명감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행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희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희망에 따라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그런 희망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이라 여겨지는 가치들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대장정 기간에 생존자보다 사망자가 훨씬 많았다는 사실은 옌안정신에 독특한 공헌을 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자기가 살아남았다는 의식은 생존자의 혁명적 사명감에 신성함을 부여했으며 거의 종교에 가까운 헌신을 낳았다. 훗날 마오는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기이하게 생각하며 죽음이 단지 나를 원치 않았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대장정은 실제적으로 혹은 훗날 상징적으로 죽음 속에서 생존하는 최고의 극단적인 시험이었다.
옌안 시기에 공산당 통치하에 있던 지역들에서 2천년간 중국사회의 지배엘리트였던 신사 지주층이 쇠락하고 붕괴되기조차 했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사회혁명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본 침략군은 본의아니게 혁명에 공헌했다. 일본이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 국민당 군대와 관료들을 제거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은 사회혁명과 내셔널리즘의 목적을 위해 농민을 조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혁명적 상황이 아무리 무르익었다 하더라도 혁명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직 혁명가만이 혁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의 관계여야 한다. 모든 돌변과 비약은 투쟁을 통과해야만 하는 일종의 혁명이다. 동시에 마오는 반스탈린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른바 사회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모순은 점진적인 진화과정을 거쳐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정통 스탈린주의의 주요 내용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질적인 비약, 과거와의 근본적인 단절, 계속되는 일련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마오의 주장은 스탈린주의 이론을 전면 거부하는 것이었다. 모리스 마이스너]
서평; 백승욱,《월간 사회진보연대》2002년 9월호
결국 사회주의가 국가주의와 발전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굴복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밝혀내려는 것, 그것이 이 책에서 찾아낼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여러 가지 쟁점들 중 몇 가지만 추려보자.
첫 번째 문제는 중국의 사회주의 역사적 경험 속에 강하게 깔려있던 민족주의라는 쟁점이다. 이는 1919년 5.4운동 이래 외세로부터 독립하고 분열을 극복한 통일된 그리고 부강한 중국의 건설이라는 열망으로 나타나, 사회주의적 경향과 병행하면서도 그것을 왜곡시켜 왔다. 그것은 농촌중심의 혁명전략이 결국은 도시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농촌에 대한 착취를 가속화하는 모델로 나아가게 만들었고, 끊임없이 ‘질서'의 이름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고, 문화혁명 종료 후 일종의 '조국방어'라는 명목 하에 미국과의 관계개선으로, 나아가 개혁개방의 새로운 산업화의 길로 나아가게 만든 요인이었다. 그 판본이 소련을 더욱 모방한 중앙집중적 형태이든, 아니며 마오식으로 다소 탈집중적인 형태이든 간에 은폐된 민족주의는 넘어서지 못했던 한계점으로 작동해 왔다.
둘째로 중국의 사회주의 경험과 노동계급 사이의 모호한 관계라는 쟁점이 등장한다. 1930년대 중국사회 성격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은 1930년대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노동계급을 형성하였다. 그 상대적 규모가 아니라 절대적 수만 놓고 보면 1940년대 말 중국 노동계급의 규모는 1917년 혁명 당시 러시아 노동계급에 비해 뒤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1920년대 여러 차례의 도시혁명의 패배이후 중국혁명은 농촌으로 철수했고, 잘 알려져 있듯이 근거지와 홍군을 통해 ‘농촌이 도시를 포위'함으로써 중국혁명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시기에도 마오의 초점은 도시는 아니었다. 인민공사로 대표되는 대약진기의 새로운 모델의 출발점도 농촌이었고, 농촌이 도시를 포위해가는 전략이 중요했다. 이는 양면적인 함의를 지닌다. 한편에서, 대중운동으로서 사회주의는 반드시 도시노동자들만의 운동은 아니며, 그 '대중'형성적 측면을 포괄하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며, 그런 점에서 '사회혁명'임을 강조해 보여준다. 다른 한편 중국사회주의에서 노동계급이 운동의 주체로서 등장한 것은 상당히 뒤늦은 일이었고, 그것은 문화대혁명시기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갖추려 하였다. 그러나 문화혁명시기 도시노동자의 대중적 열기는 달아오르는 동시에 억제되었고, 안정된 생산의 지속을 위해 다시 봉쇄되었다. 더더구나, 농촌과 도시의 높은 장벽을 통해 상대적으로 보호된 도시의 안정적 노동자층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특권세력화하였고, 이 때문에 문화대혁명기 노동자 '조반' 세력은 농촌과 도시의 경계에 서있던 '임시노동자'들이었다. 사회주의 하에서 중국노동자들은 '코포라티즘'적으로 통제되고 보호받던 세력이었으며, 이들이 오히려 사회적 동요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1990년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본격화하게 되는 가운데에서였다. 중국혁명은 노동계급의 자기전화 없이 사회주의적 전화의 길을 겪었다는 역설로 드러난다.
셋째, 문화대혁명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뜨거운 쟁점이 된 것은 사회주의 하에서의 계급의 존재였다.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주자파)으로 지칭된 세력을 색출하는 작업으로 나타난 이 쟁점은, 소유제의 사회주의적 개조의 완료에도 불구하고 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 복귀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난제를 제기하였다. 그에 대한 대답은 때로는 주의주의적인 사상문제로 나타나거나, 때로는 과거의 계급성분의 유제로 나타나면서 편향을 극단화하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그와 연관하여, 이런 경향을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라는 쟁점을 제기하는 것이었는데, 이 또한 주자파를 정치적으로 색출하고 억압하는 것으로 답이 아닌 답을 제시하였을 뿐이다. 마오는 분명 '이데올로기 혁명'의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그것은 때로 사상개조로, 때로 정치적 억압으로, 때로는 대중의 주도성으로 일관되지 않은 시도들로서 문제를 제기하였을 뿐이다.
넷째, 그러나 가장 큰 문제의 핵심은 대중운동과 당 사이의 관계였다. 마오의 가장 큰 이율배반을 보여준 사례는 마오가 문화혁명의 마오주의적 좌파들을 제거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을 종결시켰다는 점이었다. 그 좌파들은 처음에는 ‘극좌'에서 다시 '극우'로, '트로츠키주의자'로, 제국주의의 '첩자'로 다양한 죄명을 받고 사라져갔다. 1950년대 후반 반우파투쟁시기에 이미 등장한 이런 이율배반은 문화혁명기에 극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억제를 벗어나 폭발한 대중운동은 사회주의 하에서의 억압의 핵심적 적대세력으로 당관료를 지목하였고, 올바른 당과 잘못된 당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화한 당기구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갔다.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당이 아니라 당을 전복하는 대중운동이라는 역설에 직면한 마오는 결국 당의 편에 섰고, 인민해방군이라는 억압장치가 대중운동을 억누르게 되었으며, 당이 두 가지 노선에 의해 균열되어 있다는 입장을 버리고 당을 숙정함으로써 당의 무오류성을 회복하는 입장으로 전환하게 된다. 마이스너가 문화대혁명을 1966년-69년의 짧은 3년으로 보는 것도 이처럼 대중운동의 주도성이 사라지면서 무오류성의 신화를 자기강화하는 당이 복원된 시점을 중국사회주의의 실험의 종료점이라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그저 '이후'였을 뿐이다.
그 이후 1970년대에 도시노동자에 대한 소비주의적 포섭의 단초가 열리고, 대미선망적 민족주의라 할 수 있는 것이 개시된 것을 고려하면 1980년대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이미 문화혁명의 종료로부터 열려있던 것이기도 했다.
마이스너는 마오주의의 신화를 글자그대로 믿는 마오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오시기의 시도들을 ‘봉건적 잔재'나 '낙후된 농촌주의'의 잔재로 평가하는 근대화론자도 아니다. 마이스너가 강조하는 것은 마오와 마오시기가 직면한 역설들이다. 사회주의를 지향한 중국이 왜 사회주의가 될 수 없었는가를 되짚어보려는 시도로서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는 앞으로도 중요한 문제제기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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